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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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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공은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1위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이 칭호는 14세기 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3세가 처음 사용했으며, 스페인 왕가의 연합을 상징한다. 아스투리아스 공은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서 여러 칭호를 가지며, 1978년 헌법에 따라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현재는 펠리페 6세의 장녀 레오노르 공주가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아스투리아스 공 재단은 매년 아스투리아스 공상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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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공
개요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의 문장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의 문장
작위여공
봉토아스투리아스 공국
형식여왕 폐하
거주지사르수엘라 궁전 내 왕세자 관저
임명권자스페인 국왕
제정1388년 9월 17일
초대엔리케 3세
웹사이트스페인 왕실 공식 웹사이트
공주의 기
공주의 기
상세 정보
Príncipe de Asturias (스페인어)아스투리아스 공
Princesa de Asturias (스페인어)아스투리아스 여공
Princesa consorte de Asturias (스페인어)아스투리아스 공비
Infante (스페인어)왕자
Infanta (스페인어)공주
Príncipe de España (스페인어)스페인 공
현직
현임자레오노르 데 보르본
임기 시작2014년 6월 19일

2. 역사

14세기 카스티야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잉글랜드웨일스 공 칭호를 본떠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가 만들어졌다. 1388년 바욘 조약을 통해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랭커스터 공작 존 간의 왕조 분쟁이 종식되었다.[5] 이 조약으로 랭커스터 공작의 딸 카탈리나와 후안 1세의 장남 엔리케 3세가 혼인하고, 엔리케 3세는 아스투리아스 공 지위를 상속받았다.[5]

초기 아스투리아스 공은 아스투리아스 영토 통치권을 가졌으나, 후안 2세1444년 토르데시야스 칙령으로 왕위 계승자의 마조라토에 연결했다.[20] 그러나 일부 도시는 푸에로에 반하여 따르지 않았다.[21] 가톨릭 군주 시대에 칭호는 명예로운 것으로 제한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를 거쳐 현재까지 유지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부르봉 왕가는 아스투리아스 공국을 스페인 왕위 계승자와 동일시했다.[7] 19세기 초 1812년 스페인 헌법은 국왕 후계자에게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부여했으나,[29] 1837년과 1845년 헌법에서는 삭제되었다.[31] 1869년 스페인 헌법은 칭호를 유지했지만,[34] 1876년 헌법에서 다시 생략되었다.[34] 1978년 스페인 헌법 제57조는 왕세자가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도록 규정했다.[10]

2. 1. 기원: 노레냐 백작령과 히혼 백작령

아스투리아스 공국의 기원은 고대 아스투리아스 데 오비에도 영토에 위치한 노레냐와 히혼의 백작령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아스투리아스 출신"이라고 불린 로드리고 알바레스에게 속한 영주 관할 구역이었다.[11] 이 영지들은 독특했는데, 먼 옛날 군주제의 기원과 동일시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형성했던 영토였다.[12]

노레냐 성, 19세기 판화


1333년 로드리고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그는 자신의 영지를 트라스타마라의 백작 엔리케에게 유증했는데, 엔리케는 페드로 1세 국왕의 사생아 이복 형제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스투리아스 데 오비에도에서는 루이스 수아레스 페르난데스의 표현에 따르면 "진정한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는 작은 영토에 정착한 기사단이 트라스타마라 백작(국왕에 대항한 내전 중)이 점령하고 있던 "국가"의 통합이 자신들의 권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3] 엔리케는 국왕이 된 후 자신의 사생아 아폰소 엔리케스에게 이 백작령들을 양도했다.[14] 그의 이복 형제 후안 1세 국왕 통치 기간 동안 노레냐와 히혼의 백작은 여러 차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국왕은 이 백작령들을 몰수하여 왕실 영지에 편입하기로 결정했고,[15] 1383년 7월 18일자 문서에서 이들이 항상 왕실 소유로 남을 것이라고 약속했다.[16]

2. 2. 공국의 창설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부터 통치자들은 동맹에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전통적인 군주제로는 관리하기 어려운 지역을 다스릴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고자 영주권을 만들었다.[3] 이 영주권은 기원부터 매매가 이루어졌다.[3]

1369년 카스티야 왕 페드로 1세가 암살된 후, 존, 랭커스터 공작과 두 명의 트라스타마라 왕위 요구자인 엔리케 2세와 그의 아들 후안 1세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존은 콘스탄체의 남편으로서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했는데, 콘스탄체는 페드로 1세의 정부 마리아 데 파디야 소생의 장녀였지만 1362년 코르테스에서 적법한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20년간의 갈등 끝에, 엔리케 공 (후안 1세의 아들이자 상속자)과 캐서린 (존과 콘스탄체의 유일한 생존 자녀)의 결혼을 통해 타협이 이루어졌다.

1388년 7월 8일, 바욘 조약이 랭커스터의 존과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 사이에 체결되어, 페드로 1세 국왕 암살 이후 최종적인 왕조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조약으로 랭커스터 공작과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딸 캐서린을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의 장남이자 미래의 엔리케 3세와 결혼시켜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엔리케 3세는 아스투리아스 공 지위를 상속받았다.[5] 이 칭호는 의식을 통해 부여되었다.[18]



후안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엔리케 3세의 미성년으로 인해 공국의 제도적, 법적 형태가 형성되지 못했고, 알폰소 엔리케스는 국왕 칙령으로 자유를 얻은 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국왕 군대에 포위된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중재에 복종했고, 샤를 6세는 백작에게 아스투리아스에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영토는 진압되었고, 왕실 지위가 확인되었다.[19]

창설 초기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는 단순한 명예 칭호가 아니라 아스투리아스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포함했다. 공은 국왕을 대표하여 통치했고, 판사, 시장 등을 임명할 수 있었다. 후안 2세는 1444년 3월 3일 토르데시야스에서 칙령을 통해 공국을 관할 영주로 전환하여, 오비에도의 도시, 마을, 장소를 그들의 수입과 관할권과 함께 왕위 계승자의 마조라토에 연결했다.[20] 그러나 이 문서는 아스투리아스 도시들이 전통적인 푸에로스에 반했기 때문에 일부 복종하지 않고 무시되었다.[21] 같은 해 5월 31일, 미래의 엔리케 4세는 마조라토를 시행하려 했고, 오비에도와 21개의 주요 아스투리아스 마을이 그의 영지에 속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비록 그는 "미성년과 왕국에서 발생한 큰 논쟁과 스캔들 때문에 [공국을] 실행하거나 사용하지" 않았다.[22]

법적 형성에 따라 공국-영주라는 이중성이 회복되었고, 가톨릭 군주 시대까지 공의 관할하에 지속되었으며,[23] 가톨릭 군주는 이 칭호의 범위를 제한하여 단순히 명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 결정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구성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 모두가 전통적으로 아스투리아스 공으로 여겨졌지만, 모든 사람이 관할 영주가 부여된 공식적인 행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24] 엄밀히 말하면, 아스투리아스 공은 1388년부터 1390년까지의 엔리케, 1444년부터 1453년까지의 엔리케, 1468년부터 1474년까지의 이사벨, 1496년부터 1497년까지 잠시 있었던 후안 뿐이었다.[25] 공이 선포되지 않은 기간 동안, 공국은 사라지지 않고 군주가 직접 통치했으며, 관할 수입은 군주의 금고로 보내졌다.[25]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쿠벨스가 1877년에 그린 ''후안 공의 교육''. 후안은 가톨릭 군주의 유일한 아들이자 생전에 그들의 모든 영토의 상속자였다.


가톨릭 군주 시대에 왕실 재산을 재통합하는 정책이 시작되었고, 이는 1483년부터 1490년까지 지속된 공국과의 오랜 싸움을 야기했다. 이 기간 동안 키뇨네스 가문이 500만 마라베디와 레온의 바비아스를 대가로 캉가스, 티네오, 야네스, 리바데세야 구역을 왕실에 넘겨주는 협약이 체결되었다.[26] 1496년 5월 20일 왕실 서한을 통해 공국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 서한에서 군주는 "그들의 왕국(아라곤을 암시)의 고대 관습을 준수하고자" 후안 공에게 이전에 왕실에 귀속되었던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수입과 관할권을 부여하고, 대부분의 판사와 그의 재산을 양도하지 않는 조건을 유지했다.[27]

세습에 이러한 프린시페(príncipees) 칭호를 사용하는 관습은, 잉글랜드의 황태자가 웨일스 공을 칭하는 관습을 직접적인 모델로 하여 14세기에 시작되었다. 카스티야왕페드로 1세가 이복형인 엔리케 2세에게 살해된 후, 카스티야 왕위는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페드로 1세의 사위인 랭커스터 공존 오브 곤트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졌고, 20년에 걸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분쟁의 타협안으로 양 가문의 혼인이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후일의 엔리케 3세와 그의 왕비이자 존 오브 곤트의 딸인 카탈리나가 각각 "아스투리아스 공", "아스투리아스 공비" 칭호를 칭하고, 아스투리아스 공령을 얻었다. 아스투리아스 공령이 이러한 특별한 입장에 놓이게 된 배경에는, 이베리아 반도가 무슬림에게 지배받던 시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기독교도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고, 후에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그리고 스페인 왕국으로 발전해 간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는 역사에 기인한다.

이후, 카스티야의 황태자가 자동적으로 아스투리아스 공령을 얻는다는 관습은 가톨릭 군주의 의향에 따라 폐지되었고, 합스부르고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에서의 "아스투리아스 공"은 단순한 의례 칭호가 되었다.

2. 3.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의 쇠퇴

존 왕자에 의해 이 칭호는 스페인 군주가 사용하는 칭호 목록에 추가되었으며, 상속자는 아스투리아스 공, 헤로나 (1496), 스페인, 그리고 신세계의 칭호를 추가했다. 제국주의적 열망은 가톨릭 군주의 상속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칭호, 즉 "이 왕국들의 공, 스페인과 신세계의 공" (Príncipe de estos Reynos, Príncipe de las Españas y del Nuevo Mundoes)에서 관찰된다.[6] 이 칭호는 스페인 왕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들어서면서 부분적인 쇠퇴기를 겪는다.[6] 예를 들어, 펠리페 2세는 아버지가 부재할 때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아스투리아스 공처럼 교육받지 않았다.[25] 16세기와 17세기는 칭호와 영토에 관련된 품위를 놓고 왕과 공국 사이에 다양한 갈등이 특징이었다.[28] 펠리페 4세의 통치 기간에만 공이 상속자로서 선서를 하는 적절한 의식이 도입되었다.[7]

2. 4. 부르봉 왕가 시대의 변화

1388년 바욘 조약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랭커스터 공작 존 사이에 체결되어, 페드로 1세 국왕 암살 이후의 왕조 간 화해를 이루었다.[5] 이 조약으로 랭커스터 공작 부부는 딸 캐서린을 후안 1세의 장남 엔리케 3세와 결혼시켜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엔리케 3세는 아스투리아스 공 지위를 상속받았다.[5]

초기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는 단순한 명예 칭호가 아니라 아스투리아스 영토 통제권을 포함했으며, 공은 국왕을 대표하여 통치하고 판사, 시장 등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안 2세1444년 토르데시야스 칙령을 통해 공국을 관할 영주로 전환하여 왕위 계승자의 마조라토에 연결했다.[20] 하지만 이 문서는 아스투리아스 도시들이 전통적인 푸에로에 반했기 때문에 일부 경우 복종하지 않고 무시되었다.[21]

이후 법적 형성에 따라 공국-영주라는 이중성이 회복되었고, 가톨릭 군주 시대까지 공의 관할하에 지속되었으며,[23] 가톨릭 군주는 이 칭호의 범위를 제한하여 단순히 명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 결정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구성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

가톨릭 군주 시대에 왕실 재산을 재통합하는 정책이 시작되었고, 1496년 왕실 서한을 통해 공국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후안 왕자가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후안 왕자의 칭호는 스페인 군주 칭호 목록에 추가되었으며, 상속자는 아스투리아스 공, 지로나 공, 스페인 및 신세계 공 칭호를 추가했다.

펠리페 2세는 아버지 부재 시 섭정 역할을 수행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아스투리아스 공처럼 교육받지 않았다.[25] 16세기17세기는 칭호와 영토에 관련된 품위를 놓고 왕과 공국 사이에 다양한 갈등이 있었다.[28] 펠리페 4세 통치 기간에만 공이 상속자로서 선서를 하는 적절한 의식이 도입되었다.[7]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에 오면서 아스투리아스 공국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왕가는 전쟁 동안 카스티야 왕국 지원에 따라 공국을 스페인 상속인과 동일시하는 것을 장려했고, 아스투리아스 공국은 스페인 영토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7]

2. 5. 19세기 헌법과 아스투리아스 공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아스투리아스 공국을 스페인 왕위 계승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전까지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가 소유했던 아스투리아스 공국은 이제 스페인 영토로 간주되기 시작했다.[7]

19세기 초, 헌정 체제가 도입되면서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812년 스페인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한 아스투리아스 출신 대의원 아구스틴 아르궤예스는 국왕의 후계자에게 "관습"에 따라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9] 헌법 제정 위원회는 왕세자를 아스투리아스 공으로 인정하고, 코르테스가 그의 출생을 발표한 직후 그를 승인하며, 왕자가 14세가 되면 코르테스 앞에서 가톨릭 신앙, 헌법 보존, 국왕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도록 제안했다.[29]

스페인 군주국의 정치 헌법 초판 표지. 카디스, 1812년 3월 19일


그러나 이 칭호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대의원들은 칭호를 "아스투리아스 공"이 아닌 "스페인의 공"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고, 다른 대의원들은 왕세자가 서약 이후에만 칭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궤예스 외에도 페드로 잉구안소 리베로와 알론소 카녜도 비힐 등 아스투리아스 출신 대의원들은 이 칭호가 명예로운 칭호이거나 왕실 권한은 없지만 역사적으로 옹호된 명목상의 칭호라고 주장하며 옹호했다.[8] 결국 이 안은 변경 없이 최종 승인되었다.[30]

1812년 헌법에서 아스투리아스 공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 제201조: 국왕의 장자는 아스투리아스 공의 칭호를 가진다.
  • 제206조: 아스투리아스 공은 코르테스의 동의 없이 왕국을 떠날 수 없으며, 동의 없이 떠날 경우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 제208조: 아스투리아스 공, 인판테 및 인판타,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후손은 국왕의 신민으로서 [국왕의] 동의와 코르테스의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 제210조: 아스투리아스 공은 그들의 내부 정부의 규제를 방지하는 형식으로 코르테스에 의해 인정받는다.
  • 제211조: 이 인정은 그의 출생 후 열리는 첫 번째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 제212조: 아스투리아스 공은 14세가 되면 코르테스 앞에서 다음의 서약을 한다: "N. (이름) 아스투리아스 공, 나는 하느님과 성경에 맹세합니다. 나는 가톨릭, 사도, 로마 종교를 옹호하고 보존하며, 왕국 내 다른 종교를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스페인 군주국의 정치 헌법을 지키고, 국왕에게 충실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나 1837년과 1845년 헌법에서는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가 삭제되고, 대신 "왕관의 직계 후계자"(1837년 헌법 제20조), "왕관의 직계 후계자", "직계 후계자", "국왕의 장자"(1845년 헌법 제39조, 제47조, 제61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31]

1850년 5월 30일 왕령은 "남성이나 여성에 관계없이" 군주국의 헌법에 따라 "왕관의 직계 후계자"에게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계속 사용하도록 허용했다.[32][33] 이에 따라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가 1851년 12월 20일에 낳은 딸 이사벨 여공작은 "아스투리아스 공주"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1857년 남동생이자 미래의 알폰소 12세가 태어나면서 이 칭호를 잃게 되었다.

1869년 스페인 헌법은 아스투리아스 출신 정치인 호세 포사다 에레라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유지했다.[34] 알폰소 12세는 1874년 왕위에 올랐고, 그의 누나 인판타 이사벨이 왕위 계승 서열 1위였기 때문에 1875년 3월 25일 왕령에 의해 다시 "아스투리아스 공주"가 되었다.[35] 그러나 이후의 1876년 헌법은 1837년과 1845년 헌법과 유사하게 칭호를 다시 생략했다.[34]

알폰소 12세의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아이를 임신하자, 1880년 8월 1일 왕령이 발표되어 "공자 또는 인판타"의 출생을 기념하는 행사를 정했다.[35] 그러나 오비에도 지방 대표단은 1850년 왕령의 유효성을 근거로 칭호 반환을 요구하며 항소했다. 1880년 9월 1일 ''마드리드 가제트''에는 후계자를 아스투리아스 공으로 언급하는 왕령이 게재되었다.[35]

1880년 8월 22일 왕령은 혼란을 명확히 하고 공자와 인판테의 칭호와 명예를 정했다. 정부 수반이자 역사가인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는 왕위 계승 권리와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 사이에 "불필요하고 부정확한" 혼란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공" 또는 "이 왕국의 공"이라는 단일 명칭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왕령은 칭호가 코르테스의 창작물이 아니라 국왕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속적 관습"을 복원하여 군주의 장남에게 아스투리아스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36][37] 또한 다른 모든 직계 후계자, 남녀를 불문하고, 그 칭호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37]

1880년 9월 11일,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딸을 낳았고, 처음에는 인판타로만 취급되었다. 카노바스는 남성 왕위 계승을 원했기 때문에 아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비판이 거세지자,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의 새로운 자유주의 정부는 1881년 3월 10일 왕령을 발표하여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공주에게 아스투리아스 공주 칭호를 부여했다.[39]

2. 6. 현재의 민주주의와 아스투리아스 공

1978년 헌법 제57조는 왕세자가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며 그의 인물과 관련된 다른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스페인 왕조 연합을 상징적으로 구현했다.[10] 1975년 군주제 복고와 함께 오비에도 지방 대표단의 지원을 받은 1977년 1월 21일 왕립 칙령에 따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아들 펠리페 왕자는 전통적으로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외에 아스투리아스 공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40]

세습에 이러한 프린시페(príncipe|프린시페es) 칭호를 사용하는 관습은, 잉글랜드의 황태자가 웨일스 공을 칭하는 관습을 직접적인 모델로 하여 14세기에 시작되었다. 카스티야 왕 페드로 1세가 이복형인 엔리케 2세에게 살해된 후, 카스티야 왕위는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페드로 1세의 사위인 랭커스터 공 존 오브 곤트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졌고, 20년에 걸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분쟁의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양 가문의 혼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후일의 엔리케 3세와 그의 왕비이자 존 오브 곤트의 딸인 카탈리나가 각각 "아스투리아스 공", "아스투리아스 공비"의 칭호를 칭하고, 아스투리아스 공령을 얻었다. 아스투리아스 공령이 이러한 특별한 입장에 놓이게 된 배경에는, 이베리아 반도가 무슬림에게 지배받던 시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기독교도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고, 후에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그리고 스페인 왕국으로 발전해 간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는 역사에 기인한다.

이후, 카스티야의 황태자가 자동적으로 아스투리아스 공령을 얻는다는 관습은 가톨릭 군주의 의향에 따라 폐지되었고, 합스부르고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에서의 "아스투리아스 공"은, 단순한 의례 칭호가 되었다.

3. 칭호 및 기능

아스투리아스 공은 스페인 왕위 계승 순위에서 첫 번째이며, 왕령 칙령 1368/1987에 따라 국왕 전하의 예우를 받으며, 헌법 제57.1조에 명시된 지위를 갖는다.[2] 이는 스페인 왕가의 연합을 상징한다.[10]

아스투리아스 공 (카스티야 왕관의 상속자) 외에도, 상속자는 다음과 같은 칭호를 갖는다.[5]


  • 지로나 공, 몽블랑 공작, 세르베라 백작, 발라게르 영주는 아라곤 왕관의 상속자로서, 각각 1351년, 1387년, 1353년, 1418년에 기원한다.[42][43]
  • 비아나 공은 나바라 왕국의 상속자로서, 1424년에 기원한다.[42]


또한 아스투리아스 공 재단과 지로나 공 재단의 이사직을 맡으며, 상속자가 남성일 경우 아스투리아스 공과 지로나 공의 이름을 딴다.[44][45]

성년이 되면, 헌법 제61조에 따라 Cortes Generales|스페인 의회es 앞에서 헌법과 법률을 충실히 준수하고 시행하며, 시민과 자치 공동체의 권리를 존중하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2] 이 절차는 1978년에 도입되었으며, 이 헌법이 공포되기 전에는 아스투리아스 공이 코르테스(Cortes)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야 했다.[46]

현재 공작위의 주인공은 레오노르이며, 2014년 6월 19일 부친 펠리페 6세 국왕이 조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퇴위 이후 왕위에 오르면서 이 지위를 얻었다.[46] 1978년 헌법 제57조 제2항은 국왕의 추정 상속인은 "아스투리아스 공" 외에 "스페인 왕위 계승자에게 전통적으로 결합된 칭호"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로나 공, 몽블랑 공작, 비아나 공, 세르베라 백작, 발라게르 영주이다.[56] 지로나 공과 몽블랑 공작은 아라곤 왕국, 비아나 공은 나바라 왕국의 왕위 계승권 제1위 왕족이 보유한 칭호이다. 세르베라 백작과 발라게르 영주는 카탈루냐 귀족으로서의 칭호이며, 전자는 발렌시아, 후자는 마요르카에 각각 유래한다.

4. 역대 아스투리아스 공/공녀

사진이름 (생몰년)상속 대상자시작종료 연도종료 사유
엔리케 (1379년 ~ 1406년)후안 1세 (아버지)1388년1390년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 국왕으로 즉위.
마리아 (1401년 ~ 1458년)엔리케 3세 (아버지)1402년1405년남동생 출생으로 직위 상실.
후안 (1405년 ~ 1454년)1405년1406년카스티야의 후안 2세 국왕으로 즉위.
카탈리나 (1422년 ~ 1424년)후안 2세 (아버지)1423년1424년사망.
--레오노르 (1423년 ~ 1425년)1424년1425년남동생 출생으로 직위 상실.
엔리케 (1425년 ~ 1474년)1425년1454년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국왕으로 즉위.
후아나 (1462년 ~ 1530년)엔리케 4세 (아버지)1462년1464년귀족 간 분쟁으로 직위 박탈.
알폰소 (1453년 ~ 1468년)엔리케 4세 (이복형제)1464년1465년
이사벨 (1451년 ~ 1504년)1468년1470년엔리케 4세에 의해 직위 박탈.
--후아나 (1462년 ~ 1530년)엔리케 4세 (아버지)1470년1474년이사벨 1세의 추정상속인.
이사벨 (1470년 ~ 1498년)이사벨 1세 (어머니)1476년1480년남동생 출생으로 직위 상실.
후안 (1478년 ~ 1497년)1480년1497년사망.
--이사벨 (1470년 ~ 1498년)1498년1498년사망.
미겔 (1498년 ~ 1500년)이사벨 1세 (할머니)1499년1500년사망.
후아나 (1479년 ~ 1555년)이사벨 1세 (어머니)1502년1504년카스티야의 후아나 1세 국왕으로 즉위.
카를로스 (1500년 ~ 1558년)후아나 1세 (어머니)1504년1516년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국왕으로 즉위.
펠리페 (1527년 ~ 1598년)카를로스 1세와 후아나 1세 (아버지와 할머니)1528년1556년스페인의 펠리페 2세 국왕으로 즉위.
카를로스 (1545년 ~ 1568년)펠리페 2세 (아버지)1560년1568년사망.
페르난도 (1571년 ~ 1578년)1573년1578년사망.
디에고 (1575년 ~ 1582년)1580년1582년사망.
펠리페 (1578년 ~ 1621년)1584년1598년스페인의 펠리페 3세 국왕으로 즉위.
펠리페 (1605년 ~ 1665년)펠리페 3세 (아버지)1608년1621년스페인의 펠리페 4세 국왕으로 즉위.
발타사르 카를로스 (1629년 ~ 1646년)펠리페 4세 (아버지)1632년1646년사망.
펠리페 프로스페로 (1657년 ~ 1661년)1658년1661년사망.
카를로스 (1661년 ~ 1700년)1661년1665년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 국왕으로 즉위.
루이스 (1707년 ~ 1724년)펠리페 5세 (아버지)1709년1724년스페인의 루이스 1세 국왕으로 즉위.
페르난도 (1713년 ~ 1759년)1724년1746년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 국왕으로 즉위.
카를로스 (1748년 ~ 1819년)카를로스 3세 (아버지)1760년1788년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 국왕으로 즉위.
페르난도 (1784년 ~ 1833년)카를로스 4세 (아버지)1789년1808년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 국왕으로 즉위.
이사벨 (1830년 ~ 1904년)페르난도 7세 (아버지)1830년1833년스페인의 이사벨 2세 국왕으로 즉위.
이사벨 (1851년 ~ 1931년)이사벨 2세 (어머니)1851년1857년남동생 출생으로 직위 상실.
알폰소 (1857년 ~ 1885년)1857년1868년어머니 폐위.
마누엘 필리베르토 (1869년 ~ 1931년)아마데오 1세 (아버지)1871년1873년아버지 퇴위.
이사벨 (1851년 ~ 1931년)알폰소 12세 (남동생)1875년1880년조카딸 출생으로 직위 상실.
메르세데스 (1880년 ~ 1904년)알폰소 12세 (아버지)
알폰소 13세 (남동생)
1880년
1886년
1885년
1904년
남동생 출생으로 직위 상실.
알폰소 (1907년 ~ 1938년)알폰소 13세 (아버지)1907년1933년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으로 직위 상실.
후안 (1913년 ~ 1993년)1933년1941년스페인의 알폰소 13세에 의해 명목상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로 추대.
후안 카를로스 (1938년 ~ )후안 데 보르본 이 바텐베르그 (아버지)1941년1975년1969년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해 스페인 공 칭호 받음.
펠리페 (1968년 ~ )후안 카를로스 1세 (아버지)1977년2014년스페인의 펠리페 6세 국왕으로 즉위.
레오노르 (2005년 ~ )펠리페 6세 (아버지)2014년현재


5. 아스투리아스 공상

1981년부터 아스투리아스 공 재단은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인물에게 아스투리아스 공상을 수여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49.
[2] 서적 Constitución española INGLÉS https://www.boe.es/l[...] Boletín Oficial del Estado, n° 311, 29 December 1978
[3] 서적 Suárez González 2000, p. 395.
[4] 서적 Suárez González 2000, p. 394.
[5]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53.
[6]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61–62.
[7]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64.
[8]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67–68.
[9]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69.
[10]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73.
[11]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 393.
[12]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 396.
[13]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 401.
[14]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 407.
[15]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p. 413–414.
[16]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54–55.
[17] 웹사이트 Crónicas de los reyes de Castilla: Don Pedro, Don Enrique II, Don Juan I, Don Enrique III https://books.google[...] Antonio de Sancha
[18]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55.
[19]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55–56.
[20]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56.
[21]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57.
[22]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58.
[23]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56–57.
[24]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p. 394–395.
[25]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0, p. 395.
[26]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60.
[27]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61.
[28]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62–64.
[29]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67.
[30] 서적 Constitución política de la Monarquía español. Cádiz, 19 March 1812 http://www.congreso.[...] Congreso de los Diputados
[31]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68.
[32]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68–69.
[33] 뉴스 Gaceta de Madrid núm. 5782, de 30/05/1850, página 1 https://www.boe.es/d[...] 1850-05-30
[34]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p. 69–70.
[35]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p. 70.
[36]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37] 서적 Parte Oficial – Presidencia del Consejo de Ministros http://boe.es/datos/[...] Gaceta de Madrid, n° 256, 23 August 1880
[38]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39]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40] 서적 Coronas González 2001
[41] 서적 Real Decreto 1368/1987, de 6 de noviembre, sobre régimen de títulos, tratamientos y honores de la Familia Real y de los Regentes http://www.boe.es/bo[...] Boletín Oficial del Estado, n° 271, 12 November 1987
[42] 서적 Anguera Nolla 2008
[43] 서적 Ferrando Badía 1990
[44] 웹사이트 Estatutos http://www.fpa.es/es[...] 2016-12-13
[45] 웹사이트 Presidencia de Honor http://es.fpdgi.org/[...] 2016-12-13
[46] 뉴스 Leonor, la niña que empieza a ser princesa http://www.rtve.es/n[...] 2016-12-13
[47] 서적 Sampedro Escolar 2004
[48] 서적 Manrique 1862
[49] 서적 Manrique 1862
[50]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3
[51]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3
[52] 서적 Suárez Fernández 2003
[53] 서적 Robles do Campo 2009
[54] 서적 Apezarena y Castilla 2009
[55] 문서 アストゥリアス公の妃の正式な称号は{{Lang|es|Príncesa consorte de Asturias}}。[[:es:Princesa consorte de Asturias]]参照。
[56] 웹사이트 Su Alteza Realla Princesa de Asturias https://www.casareal[...]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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